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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맞닫은 어깨

병 속의 편지. 이영주 어둠이 검은 물질로 만들어졌다고 상상한 이후부터 시간의 꿈을 담고 싶어졌습니다. 병에 담으면 될까요? 긴 시간을 건너왔으니 따뜻했던 밤으로 돌아가고 싶어져서 그는 매일 밤 술을 마시고 병을 모으고 병을 세우고 여기에 오는 모든 사람은 찰랑찰랑한 어둠을 만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병의 입구를 꽉 움켜쥔 채 잠이 들고 나는 이불 밖으로 빠져나가는 무관한 것들을 자꾸만 쓸어 담고 너니까, 너라서, 너 때문에 지옥에 있었지. 우리의 싸움이 검고 어두워질 때 너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시간은 꿈이 되었지. 전도서를 펼치면 허무,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나는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지웠습니다. 구약성경은 어떤 종말보다 잔혹해서 병에 담고 싶어지는데 그는 매일 밤 펜을 버리고 문장을 버리고 자신을 버.. 더보기
유사. 황인찬 네가 죽은 꿈을 꿨는데 아무렇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제주도는 여전히 푸른 밤이었고 주머니에는 작은 돌 하나가 들어있었다 예쁘다며 네가 호들갑을 떨던 물건이다 너는 어디로 갔을까 밖으로 나가니 검은 모래가 하염없이 일렁이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바다였다 사람들은 어두운 바다를 보며 감탄했다 놀랍다고, 아름답다고 소리를 지르는 연인들과 가족들 왜 어두운 바다는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나 네가 죽은 꿈을 꾼 이후로는 너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 후로는 모래가 되어 흐르는 바다가 있고, 주머니 속에는 너무 오래 쥐어 미지근해진 돌이 있고 사람들은 어두운 바다 속에 잠들어 있다 더보기
풀잎. 원구식 사는 게 염증 날 때 당신이 울지 않았으면 참 좋겠다. 더보기
푸른 칵테일의 향기. 한영애 보는 순간 나의 마음속으로 걸어온 사람 멋진 모습보단 맑은 그 울림이 아름다운 가까이 있어도 왠지 알수없는 사람같아 그대는 푸른 칵테일의 향기 그댈 닮은 모습에 말하고 싶을수록 자꾸 맘속으로 숨는 이야기 은은한 그대 두눈 그눈에 내모습 비춰질 때 난 사랑을 봤어 비밀의 빛깔 비밀의 향기 그대에게 취하며 설레는 마음 만날 때마다 다른 빛깔로 그대에게 물들수록 세상이 아름다워 맑은 눈을 뜬채 아름다운 꿈을 꾸는듯해 그대의 모든 것 내겐 신비로운 여행으로 먼곳에 있어도 왠지 자꾸 나를 유혹하는 그대는 푸른 칵테일의 향기 그댈 닮은 모습에 말하고 싶을수록 자꾸 맘속으로 숨는 이야기 은은한 그대 두눈 그눈에 내모습 비춰질 때 난 사랑을 봤어 비밀의 빛깔 비밀의 향기 그대에게 취하며 설레는 마음 멈춰진 슬픔 멈춰진.. 더보기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는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더보기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유재하 붙들 수 없는 꿈의 조각들은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쳇바퀴 돌 듯 끝이 없는 방황에 오늘도 매달려 가네 거짓인 줄 알면서도 겉으론 감추며 한숨 섞인 말 한마디에 나만의 진실 담겨 있는 듯 이제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못 그린 내 빈 곳 무엇으로 채워지려나 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려 가리 엇갈림 속에 긴 잠에서 깨면 주위엔 아무도 없고 묻진 않아도 나는 알고 있는 곳 그 곳에 가려고 하네 근심 쌓인 순간들을 힘겹게 보내며 지워버린 그 기억들을 생각해 내곤 또 잊어버리고 이제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못 그린 내 빈 곳 무엇으로 채워지려나 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려 가리 더보기
이타카. 콘스탄티노스 카바피 네가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설 때, 기도하라, 그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라곤과 키클롭스,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 마라. 네 생각이 고결하고 네 육신과 정신에 숭엄한 감동이 깃들면 그들은 네 길을 가로막지 못하리니. 네가 그들을 영혼에 들이지 않고 네 영혼이 그들을 앞세우지 않으면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와 사나운 포세이돈 그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으리 기도하라, 네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를. 크나큰 즐거움과 크나큰 기쁨을 안고 미지의 항구로 들어설 때까지, 네가 맞이할 여름날의 아침은 수없이 많으니. 페니키아 시장에서 잠시 길을 멈춰 어여쁜 물건들을 사거라, 자개와 산호와 호박과 흑단 온갖 관능적인 향수들을. 무엇보다도 향수를,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최대한. 이집트의 .. 더보기
깨어나지 않는 사람에게. 김지녀 열쇠를 바꿔가며 열어봐도 열리는 것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처음으로 고백이라는 것을 했다 더보기
겨울메모. 황인찬 책상을 가운데 두고 너와 마주 앉아 있던 어느 겨울의 기억. 학교의 난방시설이 온통 고장 나는 바람에 입을 열면 하얀 김이 허공으로 흩어지던 저녁의 교실. 네가 숨을 쉴 때마다 그것이 퍼져가는 모양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뻤다는 생각. 뭘 보느냐고 네가 묻자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너, 라고 대답하고 말았던 그날. 더보기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 김승옥 '돌아온다'는 말을 얼마나 오랜만에 듣고있는가. 돌아가겠다, 돌아온다는 말이 주는 가슴 설레는 기분. 나는 얼마나 낮은 울타리 속에 살면서 돌아온 적도 떠나간 적도 없는 삶을 살았던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