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는 방 한복판에 누워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다. 낯선 곳이었으나 벽지와 창틀 같은 것이 익숙했다. 두꺼운 나무 창틀과 불투명 유리, 두 쪽의 창이 맞물리는 지점에 막대를 찔러 넣는 잠금 방식은 좀처럼 보기 힘든 구식이었다. 고는 만질만질하게 닳은 잠금 막대 머리 부분을 바라보며 샛노란 손을 떠올렸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오래 돋운 가래침을 뱉기 위해, 다리 몇 개가 떨어져 나간 납작하고 긴 벌레를 창밖으로 던지기 위해 막대를 꽂고 뽑았을 누군가의 손. 손이 그려내는 동선은 상상 속에서조차 짧고 단조로웠다. 애초에 여유 같은 건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사방을 잘라낸, 작고 좁은 방이었다.
벽지에는 기형의 무늬들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바퀴에 눌린 올챙이 같은 문양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치밀하게 그러나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엮인 무늬들. 고는 무늬와 함께 흔해 빠진 얼룩들 ― 무심하게 그어진 사인펜 자국, 콜라 맥주 따위가 폭발한 흔적, 날벌레가 남긴 게 틀림없는 고동색 점들, 종이를 붙였다 뗀 흔적과 아직까지 남아 번들거리는 스카치테이프 등등 ― 을 더듬었다. 수많은 계획표와 지푸라기만도 못한 명언, 계절과 관계없이 내내 헐벗었을 핀업 걸이 요절한 흔적이었다.
오래된 못 자국. 둥근 시계와 거울이 남겨 놓은 흰 그림자를 훑던 고의 시선이 누런 기름때에 가 닿았다. 벽 아래쪽에 옆으로 긴 타원형 얼룩이 둥둥 떠 있었고 약간 더 큰 얼룩이, 약간 더 긴 타원을 그리며 바로 아래 떠 있었다. 고는 목 잘린 눈사람 꼴을 한 저 기름때가 언제, 어느 때 생기는지 알았다. 등을 벽에 기댄 채 바닥에 앉은 인영(人影)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인영은 컵라면을 먹고 가장자리가 부스러진 손톱 발톱을 깎고 무가지신문을 뒤적이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반가워하거나 화를 내는 어떤 순간에도 벽에서 등을 떼지 않았다. 어깨를 옴죽거릴 때마다, 정수리를 벽에 부빌 때마다 기름때와 땀이 벽지에 옮겨 붙었다. 둥근 기름때는 아주 오랜 시간 꾸준히 퇴적되어 생긴 지형도였으나 어떤 종류의 기특함도 없었다. 그것이 외톨이 혹은 잉여의 지형도나 마찬가지인 탓이었다.
방은 비어 있었으나 흔적이 불러낸 기억들로 어수선했다. 고가 금세 이해할 수 있는 흔적도 있었고 아무래도 의아한 흔적 ― 이를테면 천장에 써놓은 일곱 자리 숫자들이라든가 창틀에 붙여 놓은 빨대 같은 것들 ― 도 존재했다. 이 방에 가구나 물건이 남아 있었다면 의문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 터였다. 남은 것이 사람이라면 더더욱.
고는 이 방 주인을, 사흘 전까지만 해도 이 방 주인이었던 남자를 떠올렸다.
고가 아는 것은 남자의 얼굴을 뒤덮은 맑은 땀과 펼쳐진 손바닥 정도였다. 어둠이 반쯤 삼킨 뒷모습 역시 알고 있었으나 그중 어느 것도 특별하지 않았다. 고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몽타주조차 그릴 수 없는 흔해 빠진 기억들뿐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고가 지금 누워 있는 곳 자체가 그랬다. 어느 대학 뒷골목에나 있을 법한 허름한 하숙촌. 정교하게 맞물린 늙은 건물들이 품은 방이 몇 개나 되는지, 그 안에 묶인 인영이 몇이나 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볕이 거의 들지 않는 골목에는 서로 엇비슷하게 쭈그러든 그림자들이 허정댔다. 고는 서랍 속 동전처럼 얌전히 하숙방에 담겨 있었다. 복도나 골목을 떠돈 적은 있으나 다른 사람 방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고가 살고 있는 건물 1층에는 다섯 개의 방이 마주보거나 대각선으로 엇갈린 채 놓여 있었다. 굳게 닫힌 상아색 방문마다 흘러내린 페인트 자국이 선명했다. 복도에 면한 부분만 대충 칠해 놓은 터라 방 안쪽엔 검게 곯은 나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알람 소리와 노랫소리, 누군가가 애걸복걸하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무분별하게 뒤섞여 울렸다. 얇은 벽을 타고 오르던 소리들은 수시로 복도에 떨어져 나뒹굴거나 방으로 굴러들었다.
고는 대부분의 소리들을 견뎌냈다. 정 참기 힘든 소리가 들리면 벽을 힘껏 내리치거나 방문을 걷어차 의사를 표현했다. 비슷한 구조를 가진 주변 모든 건물이 비슷한 종류의 소음들을 지니고 있었고, 비슷한 몰골을 한 사람들이 비슷한 양태로 의사를 표현했으므로, 고와 남자의 만남 역시 주변 모든 상황과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와 고가 처음 만난 건 작년 겨울이었다. 양말을 신지 않으면 걸을 수도 없을 만큼 복도 바닥이 차가웠다. 허술한 각종 틈으로 기어든 바람이 다섯 개의 문을 차례차례 두드렸으나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학이 방학 중인 만큼 실제로 비어 있는 방도 몇 있을 터였다. 고는 하루에도 몇 번씩 부러 방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곤 했다. 얼어붙어 몇 주째 열리지 않는 창문처럼, 방문까지 얼어붙어 버리는 건 아닐까 염려해서였다. 고의 걱정과 달리 문은 손쉽게 열리고 허술하게 닫혔다.
남자는 복도 끝 세탁실에서 자신의 빨래를 꺼내고 있었다. 제조회사 상표도 읽어낼 수 없을 만큼 낡은 통돌이 세탁기 안에 몸을 반쯤 밀어 넣은 채였다. 배수가 순조롭지 못해 벽돌로 단을 세운 다음 그 위에 세탁기를 올려 둔 터라 높이가 상당하긴 했다. 남자는 꼴사납게 허우적대며 쥐색 양말을 한 켤레씩 끄집어냈다. 남자의 왜소한 체격이 일을 더욱 더디게 만들었다. 고는 세탁기에 돌려야 할 빨래뭉치를 손에 든 채 계속 기다렸다. 세탁기 뒤편에 놓인 기다란 쇠 집게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고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남자 역시 어느 순간 쇠 집게의 존재를 알아차릴 거라고, 곧 그걸 사용해 능숙하게 빨래를 꺼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잠자코 선 고가 화난 것처럼 보였는지 남자는 땀에 젖은 얼굴을 꾸벅 숙였다.
이후에도 고는 세탁실에서, 화장실로 가는 좁은 복도에서 종종 남자와 마주쳤다. 남자는 변함없이 세탁기에 몸 절반을 밀어 넣고 있었다. 사뭇 심각한 표정과 땀으로 흥건한 관자놀이를 보며 고는 남자가 생각보다 고지식하거나 눈치가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쇠 집게에 대해 말해 줘야 할 필요성은 여전히 느끼지 못했다. 남자는 고와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 겸연쩍어 하는 것도 미안해하는 것도 반가워하는 것도 아닌 이상한 고갯짓이었다. 그래서 고는 더더욱,
남자가 왜 하필 자신의 방문을 두드렸던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흘 전,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고는 얇은 수건을 배 위에 올려놓고 자고 있었다. 발가락 언저리가 이상하게 가려워 좀처럼 깊이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새로 이사한 방이 있는지 벌레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벌레들은 뻔뻔하게 방 안을 가로지르고 잠든 고의 몸 위를 기어올랐다. 꼬리가 파랗게 빛나는 벌레나 삼각뿔처럼 생긴 벌레는 하숙집에 삼 년째 살고 있는 고도 처음 보는 종류였다. 벌레를 잡으면 무심히 창밖으로 던져버리던 고였지만 최근에는 담뱃불로 꼼꼼히 눌러 벌레를 죽였다. 기형의 벌레는 불쾌하고 섬뜩했다. 발가락에 스치는 게 머리카락일지 벌레의 더듬이일지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무례하고 낯선 탁음이 순식간에 방 안을 점령했다.
고는 먼저 불을 켜 발가락 사이부터 확인했다. 머리카락도 벌레도 없었는데 어쩐지 그것이 더 찜찜하게 느껴졌다. 방문을 열자 남자가 몸을 반쯤 돌리고 서 있었다. 고의 방 앞을 지나고 있는데 마침 문이 열렸다는 듯, 아니면 이제 막 돌아가려는 찰나에 문이 열렸다는 듯 어정쩡한 포즈였다. 복도 불이 꺼져 있어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덥수룩한 머리칼과 뺨이 젖어 전체적으로 축축하고 시들시들한 인상이었다.
― 삼만 원만 빌려주세요.
남자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샛노란 손바닥이 고 앞에 펼쳐졌다. 돈이 아니라 무엇을 준다 해도 쥐지 못할 만큼 퉁퉁 부어오른 손바닥이었다. 그 손에 무사히 안착할 수 있는 건 점성이 높고 집요한 대신 무게가 없는, 비루함이나 수치 정도일 것만 같았다.
― 삼만 원만 빌려주세요, 삼만 원만요.
재촉하듯 남자가 되뇌었다. 고는 남자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남자와 대화는커녕 제대로 된 인사 한 번 나눠 본 적 없는 고였다. 거절을 하는 것도, 거절하기 위해 어떤 변명을 끌어다 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거절의 말이라면 열 개라도 꾸며낼 수 있었다. 제가 마침 현금이 없어서요. 고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댁이 누군 줄 알고 돈을 빌려줘요? 짐짓 화를 내며 그렇게 소리칠 수도 있었다. 한밤중에 이게 무슨 실례예요. 돈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말을 돌려 남자를 나무라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제발요.
남자가 입을 달싹였다. 내민 손바닥도 그대로였다. 고는 그가 알아서 비킬 때까지 무심히 손바닥을 응시했다. 세탁기에 매달려 버둥대는 남자를 지켜보던 때와 유사한 종류의 침묵이 이어졌다. 헐겁게 늘어진 줄에 쇠고리가 조랑조랑 매달려 공백을 채우는 식이었다. 무겁지만 허술하고, 무의미하고 조악하지만 견디기 버거운. 고는 아주 오래전에도 이런 시간이 존재했음을 떠올렸다. 아주,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이윽고 남자가 돌아섰다.
남자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좁고 새까만 복도를 끝까지 걸었다. 고가 방문을 잠그고 다시 자리에 눕는 동안 세탁실로 간 남자는 뒷주머니에 들어 있던 빨랫줄 ― 남자의 몸에 허리띠처럼 감겨 있었는지도 모를 그 줄 ― 을 꺼내 고리를 만들었다. 고는 평소 꿈을 꾸지 않았으나 그날은 어째서인지 가볍고 다정한 꿈들이 조랑조랑 얽혀 왔다. 잠은 달고 길었다. 발가락의 가려움은 진즉 사라져 있었다.
고는 다음날 한낮이 되어서야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깔았던 이불을 걷자 검은 점 세 개가 보였다. 좁쌀만큼 작은 점인데도 튀어나온 다리와 더듬이가 또렷했다. 고는 휴지에 침을 뱉어 말라붙은 벌레 잔해를 떼어냈다. 꼭 벌레 때문이 아니더라도 주변 공기가 수상했다. 벽에 덧발린 소리들이 조급하게 문을 흔들어댔다.
하숙촌의 소란을 고는 가장 늦게 알았다. 알았다기보다 전해 들었다, 는 게 맞았다. 구급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좁고 긴 골목을 구급대원들이 얼마나 오래 헐떡이며 뛰어야 했는지. 마찬가지로 보라색 혀를 빼문 남자가 얼마나 오래 골목을 돌아 나가야만 했는지. 하숙촌 사람들은 비슷비슷한 높낮이로 떠들어댔다. 상아색 방문이 빠르게 열리고 닫혔다. 삼 년도 더 전에 제적당한 학생이래. 학과 선후배를 죄다 다단계 회사로 끌어들여서 과가 통째로 없어질 뻔했다더라. 피해액만 칠억이라던가, 대부업체까지 중간에 끼어서 그 일로 자퇴한 학생만 열 명이 넘는대.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학교 뒤에 숨어 살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터진 올챙이만도 못한 소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디서 저렇게 많은 정보들이 쏟아지는 건지, 남자의 것이 맞긴 한 건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고는 하단에 좁쌀만 한 점 세 개가 찍힌 이불을 들고 세탁실로 향했다. 늘 젖어 있거나 물이 고여 있던 세탁실 바닥이 보송보송했다. 남자가 발버둥 치다 그랬는지 구급대원들이 그랬는지 뒤로 밀린 세탁기가 벽돌 단에서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기울어져 있었다. 세탁실은 방과 마찬가지로 좁고 천장이 낮았지만 왜소한 체구의 남자가 목을 매달기엔 충분한 높이였다. 빨랫줄 하나와 고작 이만큼의 높이로 죽음이 성립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조잡하고 어처구니없는 것이 불러낸 죽음을, 고는 알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쇠 집게를 고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짐이 모두 빠져나간 남자의 방에 들어와 누웠다.
정리를 한 사람이 하숙집 주인인지 남자의 가족인지 알 수 없었으나 방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고는 ㄴ자로 구부러진 못이 대칭을 이루며 벽 위쪽에 박혀 있는 걸 보았다. 남자는 저기 걸려 있던 빨랫줄을 풀어 재활용한 게 분명했다.
― 별일 없니?
고는 바닥에 누운 채, 술렁이는 흔적들을 약간 질린 얼굴로 마주한 채 어머니 목소리를 들었다. 고의 어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조바심 찬 목소리로 저렇게 묻곤 했다. 간밤 본인의 꿈이 지저분했다거나 그릇을 깼다거나 식탁에 놓던 숟가락이 뒤집혔다거나 하는 게 이유였다.
― 좀 전에 창밖에서 누가 고야, 고야, 하고 불러대지 뭐니. 나가 보니 허리가 밀방망이만큼 긴 새까만 고양이가 도망치는데, 불길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별일 없는 거지?
― 옆방 사람이 죽었어요.
고는 별로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기분도 아니었다. 고의 시선이 기름때와 못자국과 창틀을 맥없이 더듬었다.
― 죽기 전날 나를 찾아와서는 삼만 원만 빌려 달라, 고 했어요.
― 빌려줬니?
― 아뇨.
― 그럼 암 말 마라.
고의 어머니가 은밀히 속삭였다.
― 아무한테도, 아무 말도 하지 마.
벌써 죽어버린 사람은 어쩔 수 없어, 괜히 휘말리지 말고 가만히 있으렴. 어간에 두드러지게 힘이 들어가 있어 거북하게만 들리는 말투였다. 그에 떠밀리듯 솟아오른 기억이 고의 뒷덜미를 잡았다. 아주 오래전 그날, 딸꾹질하듯 이어지던 초인종 소리와 인터폰에 디밀어지던 다양한 연령대의 얼굴들. 고의 어머니는 온갖 소란을 뒤로 한 채 고의 어깨만 꽉 붙들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절대로, 아무 말도 하면 안 돼. 주문처럼 이어지는 말에 고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었다.
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 왔으므로 이번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결코 흐려지지 않는 기억이라고 하나 기억은 기억일 뿐이었다. 어머니의 조바심과 불길함이 그저 히스테리일 뿐인 것처럼.
오래전의 고는 열 살이었다.
또래보다 현저히 몸집이 작은 열 살이었다. 같은 반 남자 아이들은 물론 여자 아이들까지 고보다 어깨가 넓고 팔다리가 길었다. 남자 아이들은 야구나 축구에서 영 맥을 못 추는 고를 싫어했다. 여자 아이들은 수수깡 같은 고의 다리와 두 뼘밖에 되지 않는 어깨를 흘겨보며 괜히 진저리쳤다. 고는 허약한 대신 눈치가 빠르고 성적이 좋았지만 아이들은 그런 고를 더욱 싫어했다.
― 늙은 쥐 같아.
여자 아이 하나가 그렇게 말했다. 아이들은 끝말잇기라도 하듯 고의 별명을 늘려 갔다.
― 늙은 쥐 같아.
― 사백 년 묵은 말라비틀어진 늙은 쥐 같아.
― 사백 년 묵는 동안 머리만 좋아진 말라비틀어진 늙은 쥐 같아.
― 사백 년 묵는 동안 머리만 좋아진, 온몸이 병균투성이라 옆에 가면 안 되는 말라비틀어진 늙은 쥐 같아.
고는 길고도 고된 자신의 별명에 지쳐버렸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몇 차례 놀린 뒤엔 다시 부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는 아무도 부르지 않는 그 지독한 별명을 좀처럼 잊지 못했다.
고는 수줍고 우울했다. 작은 쥐처럼 소리 없이 움직여 사물함에서 책을 꺼내거나 철봉에 매달렸다. 마카펜으로 얼굴에 쥐 수염이 그려지곤 했으나 가끔이었다. 아이들 대부분이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한 번씩은 놀림당했다. 고가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놀림당할 수만 있을 뿐 누군가를 놀릴 순 없다는 점이었다. 고는 수줍고 우울했으므로, 딱히 누구를 놀리고 싶단 기분은 들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면 고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옆집 문을 두드렸다.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한 원이 고의 옆집에 살았다. 원은 공부 못 하는 말썽꾼으로 유명했지만 고에게만은 호의적이어서, 떡볶이 집에서 어묵꼬치를 사주기도 하도 투구벌레 기르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맞벌이하는 부모 덕분에 원의 집은 항상 비어 있었다.
고는 원의 집에 놀러가 투구벌레 유충을 구경했다. 시리즈별로 묶인 만화책을 읽고 너구리와 짜파게티를 섞어 끓여먹었다. 고가 대수롭지 않은 것들을 하며 노는 동안 원은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연습장 가득 만화를 그렸다. 컷 대부분이 사람들을 습격하는 흡혈 곤충으로 채워져 있었다. 흡혈 후 미라처럼 변한 사람 몸에 알을 낳는 곤충 때문에 인류가 멸종되는 게 결말이라고 했다. 고는 그 만화의 유일한 독자답게 모든 곤충이 투구벌레와 똑같이 생겼음을, 등장인물들의 얼굴이 전부 다 똑같음을 지적했다. 원은 곤충 머리를 삼각뿔 모양으로 만들기도 하고 갈라진 꼬리에 파란색을 덧입히기도 했다. 장면마다 평균 서른 마리는 등장하는 곤충들을 다리털까지 세세히 그려 넣느라 만화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여름 초입의 어느 날이었다. 여름방학까지는 한 달 가까이 남았는데도 날이 끔찍하게 더웠다. 수분이 쭉 빠진 풀들이 뿌리도 없이 굴러다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운동장 모래가 한 방향으로 우우 몰려갔다.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야구공을 던지고 축구공을 찼다. 고는 매운 눈을 비비며 집으로 향했다.
집이 보이는 곳에 이르러 고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베란다 난간 사이로 몸을 반쯤 내민 원을 발견한 탓이었다. 고와 원의 집은 빌라 4층에 있었으나 실제 높이는 5층에 가까웠다. 아래를 향해 팔을 휘젓던 원이 몸을 일으켰다. 고를 향해 분주히 움직이는 손가락과 손바닥이 쉿, 얼른 올라와, 의 의미라는 걸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 아랫집에 우리 학교 애가 이사 왔어.
― 그런데?
― 근데 그 기집애가, 진짜 재수 없는 기집애거든. 혼내 주려고.
원이 바닥에 내려놓았던 장난감 낚싯대를 도로 쥐었다. 낚싯줄 끝에 꽤 굵은 돌이 하나 묶여 있었다. 난간 사이로 몸을 내민 원이 아랫집 창문을 향해 낚싯대를 흔들었다. 잘그락잘그락 돌 부딪는 소리가 요란했다. 창틀에 부딪혔는지 쇳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제법 큰 소리로 유리창이 울렸다. 누구야. 고함소리와 함께 아랫집 창문이 사납게 열렸다. 얼른 낚싯대를 거둬들인 원이 숨죽여 웃었다.
원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아랫집 혼내주기에 몰두했다. 영문도 모른 채 고 역시 원이 하는 일을 도왔다. 송 ― 아랫집, 재수 없는 기집애 이름이 송이었다 ― 은 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새벽에야 집에 오는 눈치였고 종일 동네 노인정에 앉아 있다 돌아오는 할머니는 귀가 어두웠다. 원은 피시방도 만화방도 끊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송이 집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 요 앞 사거리 단과학원 알지? 걔 거기서 수업 듣거든. 3시부터 3시 50분까지 영어, 4시부터 4시 50분까지 수학. 집에 오면 딱 5시지. 이것 봐, 문 열리는 소리 들리지?
송의 귀가 시간은 비교적 정확했다. 문소리가 들린 시점부터 원과 고는 바쁘게 움직였다. 고는 체육 실기평가 과제인 이단줄넘기 연습을 원의 집 거실에서 했다. 원은 엑스 자 뛰기 시범을 보여주거나 백과사전 한 질을 몽땅 끄집어내 바닥에 내팽개쳤다. 식탁 의자를 끌고 바닥을 두드리고 내던진 백과사전을 깃발 삼아 드리블 연습도 했다. 농구공 울리는 소리가 상당히 커서 흡족했던지 원은 맹렬히 농구공을 튕겨댔다. 볼륨을 최고로 올린 엠피쓰리를 화장실에 켜두는 일도 있었다. 등과 겨드랑 밑이 흥건해지도록 뛰고 있자면 틀림없이,
송이 올라와 원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 조용히 좀 해.
― 뭘? 무슨 소리야?
― 뛰고 싶으면 밖으로 나가면 되잖아, 왜 굳이 집 안에서 이러는 거야?
― 우리가 뭘 했다고 이래. 가만히 앉아서 만화책 본 것도 죄야?
― 거짓말 하지 마, 방금 전까지 농구했잖아. 넌 장난삼아 뛰는 거겠지만 밑에 집은 천장이 다 흔들릴 정도라고.
― 너야말로 생사람 잡지 마. 난 그런 적 없어. 쟤한테 물어봐, 내가 뭐하고 있었는지.
뻔뻔한 얼굴의 원이 도리어 송에게 따졌다. 구레나룻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고 거실에 온갖 물건이 널브러져 있는데도 숫제 모르는 척이었다. 그럴 때면 고는 벌게진 얼굴로 방에 숨어 있었으나 횟수가 늘어 익숙해지고 난 뒤에는 거실에 앉아 무심히 그들의 말다툼을 구경했다.
― 펠리컨 같아.
고는 송이 내려간 뒤 야물야물 떠들어댔다.
― 난 턱이 저렇게 긴 사람 처음 봤어, 저 누나 진짜 펠리컨 같아. 원래는 그냥 새였는데 대왕모기가 턱을 무는 바람에 펠리컨이 됐다고 하자.
고가 보기에 송은 못생기고 말 많은 펠리컨에 가까웠다. 뾰족하고 긴 턱은 물론 찢어진 눈매와 전투적으로 솟아오른 코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이 왜 재수 없는 기집애라며 괴롭히고 있는지 이해가 가는 생김새였다. 고는 좀 더 길고 지독한 별명을 짓고 싶었으나 별 호응이 없는 원 탓에 그만두었다.
조용히 좀 해줘. 송은 부탁을 하기도 하고 원에게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아예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될 텐데 원은 부러 현관까지 나가 일일이 대꾸해 주고 욕을 먹었다. 송이 물감 푼 물을 들고 올라와 원에게 끼얹은 일도 있었다. 검은색 물감인지 먹물인지 확실치 않았지만 현관이며 신발장 근처가 온통 엉망이었다. 화를 낼 거란 예상과 달리 원은 히죽거리며 샤워를 하고 바닥을 청소했다. 고는 그런 원의 반응들이 생소했으나 뛰고 의자를 넘어뜨리고 책을 내던지는 일은 즐거웠다.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된 때였다.
일찌감치 방학한 초등학교와 달리 중학교는 연일 보충수업이 계속되었다. 고는 방 안에 앉아 일주일치 일기를 미리 쓰고 동화책 줄거리를 독서록에 옮겨 적으며 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유리창을 뚫고 들어올 것처럼 햇빛이 강했다. 선풍기를 틀어 놓으면 바람을 마주한 얼굴만 미지근할 뿐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고의 어머니는 가끔 굵은 소금 몇 알을 집어 고의 혀 위에 올려놓았다. 또 원이네 가니? 고가 소금 알갱이를 씹으며 끄덕였다.
하교한 원이 얼린 수건으로 열을 식히는 동안 고가 대신 농구공을 튕겼다. 어김없이 초인종이 울리자 원이 서둘러 일어났다. 수건에서 흘러내린 물로 지저분하게 젖은 셔츠를 다른 걸로 갈아입은 다음에야 원은 문을 열었다.
― 제발, 너무 시끄러워서 미칠 것 같아, 제발 그만 해.
애원하다시피 매달리는 송을 보며 원이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고는 덩달아 고민하는 얼굴로 농구공을 치우고 반으로 갈라지거나 찢어진 책들을 정리했다. 고민은 이틀이 한계여서, 사흘째가 되면 다시금 농구공과 야구방망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고는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들뜬 얼굴로 뛰어나가는 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주말에는 혼내주기를 할 수 없었다. 송의 아버지가 집에 있었으므로 원은 발뒤꿈치를 들고 살살 걸어 다녔다. 아예 밖으로 나가 피시방과 만화방을 전전하기도 했다. 미심쩍은 얼굴을 한 송의 아버지가 올라왔다 간 뒤엔 더욱 그랬다.
― 나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평소에 좀 시끄럽게 구는 편이냐? 사내놈이니까 그럴 순 있겠는데 말이다, 농구…… 같은 걸 집에서 하는 건 아니지? 요즘 짓는 건물들이 워낙 허술하니 공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릴 수도 있겠지. 나는 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우리 집 애가 사춘기인지 워낙 예민하게 굴어서 말이다.
원은 더없이 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 집 애도 아들놈이면 좋았을 텐데. 여자애들은 유난스럽고 시끄럽기만 하지 뭔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지 뭐냐. 여튼 부탁 좀 하자.
송의 아버지를 배웅한 원은 바닥에 누워 흡혈 곤충 만화를 마저 그렸다. 진공청소기 대신 손바닥만 한 빗자루를 사용해 바닥을 청소하고, 계절에 맞지 않는 두꺼운 양말도 신었다. 쥐며느리처럼 숨죽인 채 주말을 보내고 난 뒤엔 보란 듯이 소음의 강도를 높였다. 고자질에 대한 보복이라도 되는 양 책장을 넘어뜨리고 바닥에 홈이 파일 때까지 의자를 내리찍었다.
원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늘 난폭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느 날 고는 작은방 바닥에 무릎 꿇고 앉은 원을 보았다. 원은 가볍게 쥔 주먹으로 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울림이 꽤 컸으나 상기된 얼굴과 세 번씩 끊어 노크하는 동작만은 정중하기 짝이 없었다.
― 뭐 하는 거야?
고가 묻자 원이 멋쩍게 웃었다.
― 우리 집이랑 아랫집이랑 구조는 똑같을 거 아냐. 그럼 그 기집애 방도 여기겠지. 이 아래 그 기집애 책상이랑 침대도 있을 거고. 그 기집애도 이쯤 있을지 몰라, 나랑 똑같은 자리에.
― 그게 뭐?
― 그냥 그렇다고. 괴롭히는 거야, 그냥.
괴롭히기는 두 달 가까이 계속됐다. 고와 원이 날뛰고, 송이 올라와 소리치고의 연속이었다. 고는 누군가를 놀리는 것이 즐거웠다. 원숭이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빽빽대는 송을 구경하는 것 역시 좋았다. 늙은 쥐 운운하며 자신의 뺨에 수염을 그리는 아이들의 기분을 알 것 같기도 했다. 송과 원이 다투는 동안 입 닥쳐, 펠리컨, 하고 말해 본 적도 있었다. 아무도 듣지 못했으나 가슴 어딘가가 확 열리는 기분이어서 그 뒤로도 고는 간혹 송을 향해 욕을 했다. 당장 꺼져, 펠리컨, 이 고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었다.
원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원은 중독된 사람처럼 송을 불러올렸다. 잔뜩 화가 난 송과 마주하고도 정말 반갑다는 듯 안녕, 하기도 했고 너 나 좋아하냐? 왜 이렇게 뻔질나게 찾아와, 하며 짓궂은 언사를 늘어놓기도 했다. 송이 더 팔팔 뛰는 것은 물론이었다. 고와 원은 각자 나름의 재미에 취한 나머지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한계에 이른 것은 당연하게도 송이었다.
― 너 진짜 나 좋아하는구나? 학교에서 종일 봤는데도 내가 또 보고 싶어? 정 그러면 나랑…….
느물대던 원이 말을 딱 멈췄다.
흡, 하고 짧게 바람 터지는 소리 같은 게 들리기도 했다. 이어지는 건 기묘한 침묵이었다. 고는 거실에 앉아 대충 떠들어보던 만화책을 내려놓았다. 양팔을 넓게 벌려 문틀을 잡는 형태로, 현관문을 가로막고 선 원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만화책을 한켠에 치운 고가 베란다까지 밀려 나간 식탁 의자를 끌어왔다. 침묵은 그때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돌아본 원의 뒷모습이 미미하게 변해 있었다. 구멍 뚫린 풍선처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쭈그러들고 있었던 것이다.
원의 어깨 너머로 드러난 송 얼굴이 새파랬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이 주저앉는 원을 따라 아래로 움직였다. 고가 다가가자 다가가는 만큼 송이 물러섰다. 쭈그러드는 원의 속도가 돌연 빨라졌고, 송이 몸을 돌려 뛰었다. 계단 내려가는 발소리가 요란했다.
― 왜 그래?
고가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원이 둥글게 몸을 말고 부르르 떨었다. 웃고 있는 건가 싶어 안도하려는 찰나 원이 몸을 돌렸다. 좀 전의 송 못지않게 새파란 얼굴이었다. 원은 왼손으로 옆구리께를 누르고 있었다. 손가락 틈으로 새어 나온 피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적은 양이었으나 그렇다고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 조용히 해.
놀라 소리치려는 고의 입을 원이 틀어막았다. 그 바람에 다른 쪽 손에 들려 있던 송곳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십 센티미터나 될까 말까 한 짧은 송곳이었다. 주황색 몸통에 꽂혀 있는 쇠가 뭉툭하고 시커멨다.
원이 급히 송곳을 주워 밖으로 던져버렸다. 계단을 따라 구르고 튕겨 나가는 소리가 챙강챙강 울렸다. 엉거주춤 몸을 숙인 원이 방으로 들어갔다. 셔츠를 벗자 배꼽 왼쪽에 작게 뚫린 구멍이 보였다. 피가 조금씩,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어떻게 해, 형, 빨리 병원에 가자.
― 안 돼. 병원에 가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말해야 되잖아. 경찰에 잡혀갈지도 몰라.
― 잘못했다고 하면 되잖아. 앞으로 절대로 안 뛰겠다고 빌면 돼.
― 우리 말고 그 기집애 말야. 사람을 찔렀으니까 감옥…… 에 갈지도 몰라.
― 그럼 어때서!
― 절대로 안 돼. 너, 지금 나랑 약속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이런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야. 약 바르면 금방 나아. 그러니까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구멍은 면봉이 들어갈 만큼 컸다. 고는 구급상자에 든 것을 모두 꺼내 원의 상처에 펴 발랐다. 소독약을 붓자 원의 마른 턱이 달달 떨렸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입가가 경련하듯 꿈틀거렸다. 저것 좀 갖다 버려. 원이 피 묻은 셔츠를 가리켰다. 거즈를 얇게 말아 구멍에 밀어 넣고 반창고를 붙이자 감쪽같았다. 속사정이야 어찌 됐든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 것 봐, 괜찮댔잖아. 너도 이제 집에 가.
원의 말에 고는 기다렸다는 듯 방을 나섰다. 원이 걱정되긴 했지만 그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불편하고 무서웠다. 흡혈 곤충이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해도 이 정도로 공포스럽진 않을 것 같았다.
― 절대로,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집을 나서는 고의 뒤통수에 대고, 원이 연거푸 외쳤다.
고는 원의 셔츠를 재활용 수거함에 내다버렸다. 원이 내던진 송곳은 아래층까지 굴러 내려가 있었다. 지저분하게 녹슨 송곳 끝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고는 망설이다가 그것을 주워 집으로 올라왔다. 아래층 송의 집도, 옆집 원의 집도 무서울 만큼 고요했다.
불안하고 두렵던 마음과 달리 고는 깊이 잠들었다. 작고 다정한 목소리들이 자꾸 고의 이름을 불렀다. 조랑조랑 얽혀 오는 꿈들이 사랑스러워 고는 다음 꿈을, 또 다음 꿈을 열었다. 풀숲과 잔물결 이는 호수와 빙하에 대한 꿈이 이어졌다. 누군가가 고를 일으켜 꿀물을 마시게 했다. 혓바닥 위에 놓인 굵은 소금 알갱이를 혀로 굴리며 고는 꿈에 몰두했다.
고가 문득 몸을 일으켰다. 흉포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고가 잠든 지 사흘 만이었으나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걸 고만 몰랐다. 혼곤히 잠든 고가 풀숲과 잔물결 이는 호수와 빙하를 누비는 사이 옆집 원이 죽었다는 사실도 고만 몰랐다.
원의 상처는 실로 대수롭지 않은 것일 수 있었다. 그러나 원과 고는 녹슨 송곳이 배에 구멍을 냈을 경우 생길 수 있는 위험한 상황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치명적인 균이 방치된 상처를 파고들어 원의 장기를 썩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고는 물론이거니와 갑작스레 발작을 일으켜 숨이 멎어버린 원 역시 모를 터였다. 철문이 계속해서 거친 소리를 토해 냈다. 문 안쪽에 결과를 전혀 알지 못하는 고가 있다면, 문 밖에는 결과만 알고 원인을 모르는 이들이 있었다.
― 엄마? 밖에 누가 온 거야?
고의 어머니는 문 밖의 소란보다 고가 잠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에 더 당황한 듯 보였다. 이불에 단단히 싸여 있던 고의 몸은 푹 젖어 있었다. 고는 한기를 느끼며 거실로 걸어 나갔다. 화질이 나빠 뿌옇게 보이는 인터폰 화면 안에 원의 어머니 얼굴이 보였다. 원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도, 당최 누군지 짐작이 가지 않는 사람도 차례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초인종 소리가 딸꾹질하듯 이어졌다.
― 어떻게 된 일인지 얘기만 듣게 해줘요.
― 구멍이, 배에 구멍이 왜 생긴 건지만 들으면 된다니까, 우리 애가 왜 갑자기 죽었는지…… 이유는 알아야 될 거 아니야, 이유라도…….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문 밖 목소리가 또렷했다. 고는 문을, 정확히는 체인이 걸려 있는 문을 두려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혹은 벌어져 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초인종 소리는 집요하게 이어졌고 그때마다 다른 얼굴들이 인터폰 화면에 비쳤다. 고의 눈에 문득,
식탁 위에 놓인 주황색 송곳이 눈에 띄었다.
책상 위에 놓아 둔 게 왜 식탁에 있는 건지는 중요치 않았다. 고는 작은 구멍에서 끈질기게 새어 나오던 피와 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병원에 가야 했는데. 원이 아무리 말리더라도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 형은…….
어째서인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고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 형은, 어떻게 됐어?
고의 어머니가 고의 양어깨를 꽉 틀어쥐었다. 너무 세게 쥐어 절로 비명이 나올 것 같았으나 고는 필사적으로 참았다. 고의 어머니 얼굴이 뭐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해서였다. 핏발 선 눈이 고를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 넌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고의 어머니가 또박또박, 한 글자씩 힘주어 말했다.
― 넌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까 무슨 말이든, 누구에게도 해선 안 돼. 절대로,
― 절대로, 아무 말도 하지 마.
고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아무 말도 하지 마. 원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가 금세 지워졌다. 고가 들고 들어온 피 묻은 송곳과 고의 손 주름과 손톱 사이사이 끼어 있는 핏자국. 그것을 보고 고의 어머니가 어떤 식의 결론에 이르렀는지 고는 미처 몰랐다. 고는 기묘한 침묵과 흉포한 소음 어느 쪽에도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좀 전까지 꾸었던 조롱조롱 살가운 꿈만 계속되었으면 싶었다.
고는 입을 다물었다.
원이 당부한 대로, 고의 어머니가 명령한 대로 절대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눈을 감자 다시금 잠이 밀려왔다.
― 그때 아랫집 살던 누나 말예요, 엄마.
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해가 심하게 기울어진다 싶더니 전등 스위치를 내리듯 금세 어둠이 차올랐다. 텅 빈 방 안에 있던 흔적들이 덩달아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ㄴ자로 구부러진 못도, 둥글고 흰 그림자도, 온갖 얼룩들과 잉여의 지형도인 누런 기름때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고는 뻣뻣해진 뺨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 원이 형 죽고 나서 창밖으로 뛰어내렸던 아랫집 누나 혹시 기억나세요?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몸 어딘가가 불구가 됐다고 했잖아요. 우리는 서둘러 이사 나오느라 몰랐지만.
― 갑자기 옛날 일은 뭐 하러.
― 옛날 일이라고 기억에서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때, 그 누나가 왜 죽으려고 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다들 이상해하기만 했죠.
― ……아무 말 마라.
― 그럼요, 엄마. 나는, 안 해요. 아무한테도, 절대로 말 안 해요.
― 괜찮니?
― 절대로, 아무한테도, 아무 말도 안 해요.
전화를 끊자 기묘한 침묵이 방 안을 메웠다. 고는 조심스럽게 벽을 쓰다듬었다. 남자는 이쯤에서 공부를 하고 전화를 하고 한숨을 쉬고 했겠지. 이쯤에서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누군가의 방 벽을 두드렸는지도 몰라. 그렇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겠지.
고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훈기라곤 하나도 없는 방이었으므로 등에 닿는 벽 또한 차고 섬뜩했다. 고는 이 방에 아주 조금만, 조금만 더 머물 작정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 왔으므로 이번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아무에게도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채 오래된 방에 스스로를 유폐한 채로, 고는 그렇게 살아 나갈 작정이었다.
'서랍 > 맞닫은 어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 정재호 정용국 차혜림 윤정선 전수경 (0) | 2017.02.02 |
---|---|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한강 (0) | 2017.01.03 |
칠월. 허연 (0) | 2016.12.16 |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프랜시스 베이컨과의 25년간의 인터뷰- (0) | 2016.12.16 |
17. 椎名林檎 (0) | 2016.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