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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맞닫은 어깨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 정재호 정용국 차혜림 윤정선 전수경

직업과 작업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재미있어야 할까? 당연히 작업이 재미있어야 한다. 작업이 괴로우면 시소를 타는 건 불가능하다. 직업이 더 즐겁다면 그걸 택하면 된다. 그런데 일은 고되지만 돌아가서 작업하는 게 즐겁다면 작업을 해야한다. p.21

직업이란 '나의 활동으로 생산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그 대가로 무엇을 얻어 그 활동과 을 다시 지속할 수 있게 하는 일' 이라고 생각한다. 그 '일'을 지속해야 자신의 '삶'도 무언가를 줄 수 있다. p.28

우리가 직업 처럼 작업을 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두 가지를 말하려 한다. 첫째, 노동이다.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처럼 하루에 8시간 가량 그리기를 해야한다. (중략) 둘째, 직업에 대한 관점을 가져야 한다. p.29

작가는 세상과 어떤 주고받음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세상과 무엇을 주고받느냐는 작가가 가진 역량에서 나온다. 여기에서 역량이란 단순히 잘 그린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라는 태도에서 나온다. p.32

첫째, 미대생이라면 대학에 다닐 때 부터 '직업'을 준비해야 하다. 졸업 후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미리 준비하라는 것이다. (중략) 무엇이든지 경제적 활동을 꾸준히 지속하면 안정적인 상태에서 작업할 수 있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작업만 하면서 산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p.36

둘째, 과제를 하지 말고 작업을 해야 한다. (중략) 나는 방학 때 작업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통해 그 학생이 작업을 계속할지 아닐지를 판단한다. (중략)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자유로운 시간이 찾아온다. 바로 이때, 작업이 아닌 과제를 하던 학생은 그 시간이 고통이 되고 결국 작업을 두려워하게 된다. 학기중에도 과제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작업을 열심히 해야 한다. p.37

셋째, 그리고, 보고, 읽고, 써야 한다. 본다는 것을 인터넷을 보는 게 아니다. '직접' 보라는 것이다. (중략) 글을 써보면 알겠지만, 글을 쓴다는 건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기를 써봐서 알겠지만 끝맺음을 한다는 건 쉽지 않다. 억지로 쓰다보면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로 끝난다. (중략) 글을 쓰고 또 쓰다보면 자연스럽게 오늘보다 내일을 기대하는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그 고민을 작업을 통해 논리적으로 풀어내다보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다. p.38

넷째, 소모적인 인간관계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라. p.39

다섯째, 존경과 겸손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것을 기꺼이 존경하고, 자신이 낫더라도 겸손한 태도를 가져라. 그 대상은 사람일수도, 작품일수도, 세상의 어떤 모습일수도 있다. (중략) 한편 존경과 겸손과는 정반대의 자세도 필요하다. (중략) 작가가 작업을 계속한다는 건 긴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다. 거창한 지향점만으로는 작업을 지속할 수 없다. 내가 지금 다른 사람의 성공 앞에서 배가 아프다는 건 나에게 구체적인 목표가 있고, 선명한 지향점이 있다는 걸 말한다. 그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떳떳하게 인정하며 열심히 그리면 된다. p.40

"너 자신도 처음 보는 그림을 그려라." 그림을 시작했을 때, 머릿속에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떠오르면 안 된다는 것이다. p.43

작업을 할 때 작업의 구조를 고민해야지 미리 결과를 예측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학생들에게 작업 계획을 발표하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어떤 소재, 주제, 매체를 가지고 어떻게 그리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림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설령 그렇게 그려진 그림은 재미없다. 그보다는 '어떤 조건을 던졌을 때 어떤 그림이 나올지도 몰라. 아니면 말고'식으로 미술을 대하는 태도가 낫다. 하나의 그림을 그릴 때 또는 삶을 구상할 때, 결과를 예측하려 들지 말자. 그저 좋은 과정과 태도를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p.43

자기를 찾아오는 운은 거부하지 마세요. 자기 좋다는 사람 거부하지 말고, 자기에게 온 기회를 거부하지 말고, 더 좋은 걸 고르려 하지 마세요. p.50

너무 고민하지 말고 해보세요. p.53

Q. 그런데 최종적인 목표는 결국 하나라고 생각하거든요.

A. 그럼 거기로 가야죠. p.55

진짜로 하고 싶다면, 그걸 해야 행복하지 않을까요. p.56

작업을 하다보면 스스로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 의문을 풀지 못하고 그냥 그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 작업에 어떤 내적 필연성이 있어서, 목적없이 헤매는 것 같지만 나름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된다. p. 125


마음속에 자리한 커다란 덩어리는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는 것이자, 커다란 점이면서 동시에 구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백과 그림자, 메아리의 공간. 그런 생각이 들자, 저 너머 세상의 풍경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걷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작가의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중심에 묶여있는, 그래서 중심의 회전축을 따라 그려지는 반듯한 원이 아닌 제 의지를 싣고 그려야만 하는 삐뚤삐뚤한 원이 되기로 한 것이다. p. 156


언제부턴가 작업을 구상할 때 쓰는 드로잉북에 그림보다 글자가 더 많아졌다. 생각을 뱉어내는 과정에서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집중하게 되었다. 어느새 작업의 드로잉이 내가 쓴 소설이 되었다. 글이 점점 쌓여가면서, 이 글들을 작업 안으로 가져오자고 생각했다. 책으로 펴내고, 텍스트를 활용한 설치 작업도 하게 되었다. 소설 속 이야기의 한 장면, 혹은 여러 장면을 페인팅으로 옮기거나 소설에서 암시하거나 언급했던 오브제, 소설의 안 과 밖에 존재하는 다양한 재료들을 가지고 작업을 하고 있다. p. 173


몸은 좀 상하지만 작가가 자신에게 독하게 몰입하는 시간은 꼭 필요해요. 물론 단시간에 몰입한다고 해서 작업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중략) 아무것도 안 하는데 나오진 않아요. p. 240


작업하면서 처음에 생각했던 것에서 좀더 의미나 개념들이 확장되는 경우가 있어요. 작업 속에서 스스로 찾아낸 것이죠. 그런 작업은 운명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와 굉장히 밀접해 있어서 더 애착이 갑니다. 계속해서 무언가 말하고 생산해내는 작업들을 좋아해요. p. 240


학생 때는 '어떤 상태를 지향해야 해' 이럴 필요는 없어요. 작가들도 작업하면서 생각이나 태도, 개념들이 변합니다. 그런데 학생 때 자신의 태도를 규정지어버리면 그것밖에 눈에 안 들어와요. 학생들과 상담하면서 느끼는 건 좋은 작업과 나쁜 작업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눈을 키워야 좋은 작업과 나쁜 작업을 구분할 수 있어요. 그런데 아무것도 보지 않으면 눈이 커지지 않잖아요. 이상한 작업을 하더라도 내가 하는 작업이 이상한지는 알아야 하잖아요. 작가들도 작업을 하면서 '아, 이거는 좀 이상한데'라는 생각을 해요. 학생 때는 눈을 키우는 게 중요합니다. 좋은 작업을 보고 모방하라는 게 아니에요. 맛있는 것 먹으면 그보다 맛없는 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좋은 작업들을 보면서 눈을 키우라는 거죠. p. 249


작업이 생각처럼 되지 않을 때, 매너리즘에 빠져 있을 때, 저는 제가 처음 작업을 시작했을 때의 드로잉북부터 차분히 살펴봅니다. 그럼 그때의 나에게서 마모되어 드러나는, 새로운 세계 안에 존재하는 나와 대면하게 됩니다. p. 252


다른 사람의 작업을 보는 것도 좋고, 좋은 전시와 작가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장 내밀한 곳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p. 253


나는 일상 혹은 여행에서 발견한 작은 오브제, 메모, 입장권, 비행기표 등을 수집하거나 사진으로 기록하는 걸 즐긴다. 그러면서 기록과 수집을 반복하는 이유를 생각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는 유한성을 가진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잡아둘 수 없는 순간을 기억하고 붙잡기 위해 노력한다. 영원성을 욕망한다. 같은 장소의 풍경을 계속해서 사진으로 수집하는 까닭은 기억을 통해 과거를 계속 확인하고 싶은 나의 욕망 때문이다. 다소 엉뚱한 행위였지만, 이 과정을 통해 기억의 재생에 대한 궁금증을 품게 되었다. 이전까지의 기억은 특정하게 고정된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기억은 고정된 것도 과거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니다. 기억은 내가 생각하는 시점에 맞게 다시 재생되는 것이다. 내가 기억을 되새기는 시점의 심리상태에 따라 다르게 각색될 수 있는 것이다. p. 275


나는 작업이란 것은 자신이 둘러싸고 있는 생활과 환경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사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삶을 연구하고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는 것이 곧 작업이다. 나라는 핵을 중심으로 그 둘레에 작품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내가 그리고 있는 풍경들은 내 기억의 일부분이다. 또한 내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자 내 존재에 다가가는 여정을 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 278


색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도구적 기능에서 벗어나 '언어'의 의미를 갖습니다. 색은 주관적 감정을 표현 할 수 있는 유용한 조형언어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재현의 대상을 '유사'하게 그리는 의무를 벗어나게 해주기도 하고, 감각적이고 주관적인 정서적 체험을 표현할 수 있게 해줍니다. p. 280